2005년 6월 25일 토요일

길 위의 인연

여행 도중 만난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과 현지인들2003.03-2004.04


길 위의 인연은 잠시 스쳐가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오히려 쉽게 마음을 열고 좋은 기억을 나눌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각자 삶의 내력은 달라도, 이 버스를 타게 된 구구절절한 사연을 몰라도, 여행을 떠나왔고 그래서 같은 버스에 타고 있다는 사실은 뭔가를 공모한 것처럼 느끼게 한다. 애써 붙잡을 이유도 없고, 꼭 뭔가를 바랄 만한 것도 없으며 관계에 연연해 할 필요도 없으니 쿨한 만남도 이만한 게 없다.

몰디브의 수도섬에서 세시간 거리에 있는 굴히섬의 초등학교 건물 옆에서 아이들이 놀이를 하고 있다. 택택택 돌아가는 발전기가 섬 전체에 제한적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인구 700의 작은 섬. - 몰디브 굴히 섬 2004.03


서로 다른 말을 쓰지만, 눈빛과 표정, 몸짓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간다. 호기심 가득찬 눈 으로 쳐다 보다가 말을 걸면 부리나케 달아나던 아이들이 어느새 내게 먼저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어 보여 달라고 졸졸 따라다닌다. 아이들이 귀에 꽃을 꽂아 주고 조개 껍질, 소라 껍질, 야자 열매를 선물로 주었다. 맨발로 뛰고 뒹굴며 까르르 소리내 웃는 모습이 아름답다.

일상의 주변에서 온갖 인연과 이해로 얽혀있는 사람들, 소중한 사람일수록 가끔은 붙들고 있는 끈을 조금 느슨하게 놓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백배 소중한 관계가 백배 더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코스모폴리탄 2005.7.)

여행지의 기억

칠레 산티아고의 허름한 여행자 숙소. 시설은 열악한 편이지만 숙박비가 매우 저렴해 이스라엘 배낭여행자의 아지트가 되다시피 한 숙소이다. - 칠레 산티아고 2003.06


여행의 기억은 불현듯 찾아와 나를 비현실적인 시공간에 데려다주곤 한다. 그것은 환영처럼 어른거리기도 하고 꿈 속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내부가 온통 시퍼런 색으로 칠해진 방, 형광등 불빛마저 퍼렇다. 아아, 정말 춥다. 산티아고의 6월은 겨울이다. 우리의 겨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차고 습한 공기가 스멀스멀 몸 속으로 파고든다. 끓인 물을 주스병에 담아 안고서야 잠이 들었다.

융프라우 길목에 있는 작은 마을 벵발트에서 내려다본 라우터브룬넨 마을의 야경. 거리의 크리스마스 장식이 눈에 띈다. - 스위스 라우터브룬넨 2004.01


Wengwald는 융프라우 올라가는 길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민박집에서 라우터브룬넨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온 세상이 흰 눈에 덮여 크리스마스 카드 속에 등장하는 그림 같다.

이집트 시와에서 지프로 두시간 이상 달려가면 작은 오아시스에 터전을 마련한 한 베르베르 가족을 만날 수 있다. -이집트 시와 2003.12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서 어둠이 세상을 완전히 삼키기 전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막은 더욱 특별해진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이 황량한 땅에 붉은 기운이 감돌며 조금씩 어두워지고 조금씩 싸늘해진다. 다른 행성에 불시착한 것은 아닐까 잠시 착각에 빠진다.
완전한 어둠. 모래 위에 누웠다. 한 가득 별들이 쏟아진다. 유랑을 하던 베드윈들은 이 별들을 벗삼아 외로움을 달랬겠지.
‘우리 집 이름은 million stars hotel 이에요.’ 자랑스럽게 말하는 이 아이의 이름은 이브라헴
Siwa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오아시스 마을, 마을이래야 집 한 채, 한 가족과 일꾼까지 합쳐 열 명이 산다.
불을 피우고 주위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막내에게 노래를 시킨다. 귀엽다.

런던의 한 버스 정류장. 큰 도시를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눈빛에는 어떤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 영국 런던 2004.02


각국의 수도는 저마다 특징이 있지만, 또한 그 모두를 아우르는 ‘대도시’ 특유의 느낌이라는 것도 있다. 모여 살기에 적당한 인구를 한참 초과해버렸다는 느낌. 조금씩 버려지고 어딘가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있다는, 쓸쓸한 느낌.
익숙한 방법으로 캐쉬포인트에서 돈을 찾고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고, 각자 바쁜 걸음으로 사라지는 무표정한 사람들 틈에 섞인다. 남에게 애써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도시가 주는 익명성에 마음이 슬그머니 편해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코스모폴리탄 2005.7.)

같은 곳 다른 시각



인도 함삐에는 거대하고 유명한 유적이 즐비하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관광객이 북적이는 웅장한 고대 사원 보다는 초라한 시멘트 사원에서 그들의 복을 기원하곤 한다. 매우 초라하지만 현재 운영되고 있는 원숭이 사원 - 인도 함삐 2004.3.


좌린이 구도나 톤에 조금 더 관심이 있다면 비니는 사람들의 생동감 있는 모습을 담아내는 데 조금 더 관심이 있는 것같다. 하지만 서로가 찍는 장면은 대개 같이 찍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작은 원숭이 사원과 멋들어진 나무가 함께 있는 장면이나 사원에 기도를 드리러 온 다정한 부녀의 모습도 두 대의 카메라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



쁘레야칸의 특징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중앙 신전까지 통하는 문들이 점점 좁아진다는 것이다. 참배객들은 중앙으로 진입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낮추어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다 - 캄보디아 씨엠립 2005.03.


좌린은 점점 좁아져들어가는 사원의 출입문들에 관심을 가졌다. 화면 앞쪽에 소실점을 응시하는 남녀를 둠으로써 공간감을 강조했다. 반면 비니는 사원에서 소일하는 할머니를 발견했다. 사원 출입문을 L자로 배치하고 거기에 피사체를 배치함으로써 배경의 공간을 강조했다.



아침 일출을 보기 위해 찾아간 스라스랑 사원 앞 호숫가. 해가 뜨자 사원 관리나 농사일을 위해 캄보디아인들이 속속 출근을 하고 있다. - 캄보디아 씨엠립 2005.03



비니가 실루엣 피사체가 멋지게 배치되는 순간을 노리고 있는 동안 좌린은 열심히 패닝샷을 하고 있었다. 디지틀 카메라의 장점 중 하나는 마음에 드는 장면이 확인 될 때까지 패닝을 계속 시도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뉴질랜드에서의 짧은 어학연수 기간에 찍은 사진. 통학 버스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 사진을 찍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2003.03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라고, 학창시절에 사먹던 아이스크림 콘 속의 쪽지에 적혀 있었다. 이는 분명 연애에 빠진 청춘들의 관심사를 대입 시험 같은 걸로 돌려놓기 위한 제과회사와 문교부의 검은 음모임에 틀림없다. 어디를 가든 서로의 얼굴을 보고 다녀야 인생이 즐겁다.

(코스모폴리탄 2005.7.)

여행의 이유

세계 각 도시를 향하는 이정표. 아직은 서울 대신 도꾜 이정표를 통해 한국과의 거리를 짐작할 수밖에 없다. - 뉴질랜드 파울윈드 2003.05


칠레 이스터섬은 규모나 풍경에서 마치 제주도 옆의 섬 우도를 연상시키는 섬이다. 검은 화강암 사이에 난 붉은 황토길을 4륜구동 오토바이로 달리다 찍은 사진. - 칠레 이스터섬 2003.07


볼리비아의 버스터미널 사진. 이 사진을 찍고 올라탄 장거리 버스에서 카메라 한 대를 도난당하고 말았다. - 볼리비아 아레끼빠 2003.7

이집트 술탄 호텔 1층 모습. 50년 전 영국 식민정부가 빠져나간 이후로 단 한번도 보수되지 않은듯이 보이는 건물이다. - 이집트 카이로 2003.12

시드니에서 산티아고를 가는 비행기가 오클랜드 공항에 중간기착했다. 하늘을 향하는 항구, 공항은 언제나 가벼운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 뉴질랜드 오클랜드 2003.06



익숙한 빌딩을 나와 보도를 지나고 낮시간 배차간격과 막차 시간표와 내렸을 때 계단과 가장 가까운 플랫폼까지 훤히 알고 있는 역에서 지하철을 탄다. 지하철을 내려 다시 익숙한 거리로 나와 시장과 단골 가게들을 지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 방청객들이 내는 떠들썩한 감탄사를 들으며 등에 익은 침대에 몸을 누인다. 그리고는 꿈꾼다, 황량한 사막과 이국적인 해변, 낯선 풍습의 사람들과 도시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인생의 무게를 절감하게 해 주는 묵직한 배낭을 부쳐버리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비행기에 오른다. 이제 도착할 곳은 어떤 곳일까. 공항을 나섰을 때 내 얼굴을 확 휘감을 공기의 느낌은 어떨까. 사람들의 옷차림과 표정은 어떤 분위기일까, 더운 물이 나오는 화장실과 일정한 전압의 전기 콘센트를 쓸 수 있는 깨끗한 숙소를 싸게 구할 수는 있을까. 길거리에는 중무장한 경찰들이 돌아다니고 과일을 사러 들른 시장 골목에는 소매치기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지는 않을 것인가. 기내식과 함께 제공되는 포도주를 한 잔 더 청해 마시고는 좁은 의자에서 뒤척이며 내가 누렸던 모든 익숙함에 대해 떠올리기 시작한다.

저 길 너머에 무엇이 있을 지 모르고, 이정표에 등장하는 지명과 언어가 하나같이 낯선 상태. 이것이 여행이다.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나를 날려줄 비행기에 몸을 실어버릴 때, 잠자고 있던 나의 절반이 비로소 깨어난다. 내 몸에 흐르는 피는 안락한 휴식과 낯선 땅의 냄새를 동시에 필요로 하고 있다.

(코스모폴리탄 2005.7.)

둥실둥실

세 개의 작은 팜트리 섬이 다리로 연결된 리조트. 수심이 키 높이 정도로 일정해 거대한 풀장을 연상시킨다. - 몰디브 팜트리섬 2004.3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의 배경이 된 와디럼 붉은 사막. 몇 개의 모래 언덕이 붉은 벽돌을 갈아 놓은 듯한 빨간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 - 요르단 와디럼 2003.12

칠레 산뻬드로에서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 사막을 가는 투어 중에 만나는 하양, 초록, 빨강 삼색 호수 중의 하나. 광물질과 미생물 때문에 호수 바닥이 붉은 색이다. - 칠레 산뻬드로 데 아따까마 2003.7

고도 삼천미터의 안데스 고원에 전라북도 크기의 거대한 소금 사막이 펼져진다. 지형이 융기되기 전에는 이스라엘의 사해와 같은 염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볼리비아 우유니 2003.7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눈처럼 하얀 모래밭에 잡초가 무성히 돋아났다. 브라질 남부의 한 섬에서 발견한 해변 - 브라질 플로리아노폴리스 2003.11

산 뻬드로에서 엘 따시오 화산지대를 다녀오는 투어 도중 들르는 버려진 마을의 교회. 지금은 라마 목동들과 여행자들만이 가끔 들르는 버려진 마을이다. - 칠레 산뻬드로 데 아따까마2003.7

세계의 불가사의를 소개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이스터 섬의 거석상 모아이. 거대한 석상을 옮길만한 자원도 인력도 부족한 작은 화산섬이지만, 섬 곳곳에 돌하루방의 수십배 크기의 석상들이 서 있다. - 칠레 이스터 섬 2003.6

헬싱키에서 북극권 마을로 기차이동을 하는 도중에 정차한 작은 역. 오전 아홉시가 넘었음에도 아직 해는 뜨지 않고, 목재를 수송하기 위한 차량들이 눈에 덮여 짧은 낮을 기다리고 있다. - 핀란드 북부 2004.2

아르헨티나 남부의 거대한 모레노 빙하.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해마다 그 영역이 축소되고 있다. - 아르헨티나 깔라파떼 2003.10



북소리가 심장을 곧바로 울려버리듯이, 망막을 통과하지 않고 뒤통수를 관통해버릴 듯한 장면이 있다. 순도의 극한, 위대한 비밀, 압도하는 대자연... 인간의 언어로 형용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지루한 것일 터, 애매한 대명사와 모호한 비유들을 주섬주섬 끌어모아 설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오전 열시가 되어서야 동이 터 오는 북유럽의 얼어붙은 기차역에, 반경 삼천킬로미터 안에 홀로 떠 있는 화산섬에, 조금만 더 고도가 높으면 완전히 까매질 것만 같은, 안데스 고원 사막의 군청색 하늘 아래, 바로 그것이 있다. 나는 그것에 압도된다, 사로잡혀버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약간 우습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런 기분을 '둥실둥실'이라 불렀다.
"여행 하면서 어떤 게 가장 좋았어요?"
"얼토당토 않고 상상을 초월하는 풍경 앞에서 괜히 기분이 둥실둥실 해지는 거요"

밤샘 작업을 하다 문득 동창이 푸르스름한 빛으로 물들 때 담배를 한 대 물고 밖으로 나서본다. 도시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밤새 골목길을 밝히던 가로등불도 이제 가물가물 사그라들 채비를 하고 있다. 공업 표준 색상표에도, 이미지 편집 소프트웨어의 색상 피커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 조용한 푸른색이 가슴 한 켠에 잠깐 녹아든다.
'그래, 이런 기분이었지, 뭔가 둥실둥실 하는...'

(코스모폴리탄 2005.7.)

2005년 6월 21일 화요일

코스모스


"무릇 우리 코스모스는 가을을 대표하는 꽃이거늘, 6월 초부터 꽃을 피우다니 이 어찌 된 노릇인가. 당장 꽃잎을 거두어들이지 못하겠느냐"
6월의 한강변 자전거 도로 옆에서 꽃을 피운 센세이션 코스모스는 '그것은 코스모스의 일본식 명칭인 추앵(가을벚꽃)에서 비롯된 선입견일 뿐이오, 한 때 척박한 한국의 들판에 뿌리를 내린 재래종은 가을에 꽃을 피우는 단일화였지만, 이제는 세월이 바뀌어 6월부터 꽃을 피우는 것이 대세가 되었소. 가을 석양에 하늘거리는 고향의 코스모스 운운 하는 것은 그저 말 늘어놓기 좋아하는 자들의 허무한 잡담에 지나지 않는다오. 그대는 우리들의 고향 멕시코의 작렬하는 태양을 벌써 잊어버린게요'라고 항변하는 대신 그저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내맘이요"

2005년 6월 15일 수요일

광진교







한강변을 따라 출퇴근을 하다보면 멋들어지게 트럼펫을 불고 있는 할아버지를 가끔 본다.
이번에는 동호회에서 단체로 연습 나온 언니오빠들이다. 멋져요 멋져~